교육 단상

‘위하여’ 교육과 ‘의하여’ 교육

민들레
20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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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사는 삶의 함정


우리는 건배할 때 흔히 ‘위하여’라고 외친다. 어떤 가치를 ‘위하여’ 목표를 세우고 사는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일수록 그러하다. 그런데 민중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이들이 곧잘 변절하는 것은 왜일까? 춘원 이광수는 민족을 위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앞장서 창씨개명을 하고 대동아전쟁 참전을 독려했다.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많은 이들도 변절의 아이콘이 되었다. ‘위하여 삶’에 뭔가 근원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위한다’는 의식 속에는 위함의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어 있다. 민중을 위한다는 엘리트는 스스로 민중과 분리된 존재임을 고백하는 셈이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지 않고 민중의 편에 서서 죽음을 불사하기도 한다. 전봉준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대개는 상황이 바뀌면 신념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기보다 행동에 신념을 맞춘다. 생각하는 대로 살기보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쪽이 쉽다. ‘위하여’ 살기보다 ‘의하여’ 사는 것이 에너지 법칙에 맞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하여’ 사는 삶은 마치 차렷 자세로 사는 것과 다름없다. 학교 운동장에서, 군대 연병장에서 훈련을 하고 또 했던 ‘차렷’은 군기를 잡기 ‘위해’ 고안된 자세다. 훈화 시간이면 조금 쉬운 자세인 ‘열중쉬어’ 자세를 취하게 하지만, 이 또한 ‘위하여 자세’이긴 마찬가지다. 훈화에 열중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자세다. 열중쉬어 자세는 쉬는 자세라기보다 열중해야 하는 자세다. 두 발에 체중을 고르게 분산하는 일은 뇌에 상당한 피로를 준다. 때문에 훈화 말씀에 열중하는 아이들조차도 저도 모르게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게 되는데, 이른바 ‘짝다리 짚기’ 자세다.

‘차렷’과 ‘열중쉬어’가 ‘위하여 자세’라면 ‘짝다리 짚기’는 ‘의하여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지구의 중력에 순응하여 가장 자연스럽고 편하게 설 수 있는 자세다. 한쪽 발바닥의 한 지점을 통해 지구 중력과 대칭 상태를 이룬다. 새들이 한쪽 다리로 서서 쉬거나 자는 것도 그 때문이다.(그림. 돌탑과 새. 서 있는 원리가 같다.)

짝다리 좀 짚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열중쉬어 자세보다 힘이 덜 들고 언제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준비된 자세라는 것을. 조폭들이 흔히 짝다리를 짚고 건들거리는 까닭도 순간적인 방어나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짝다리 자세에서는 무게중심 이동이 쉽다. 또한 이동시 중력가속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모든 투수들이 와인드업 동작을 할 때 한쪽 다리로 서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물질세계에서 동식물이든 물질이든 모든 존재는 에너지의 효율이 가장 높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자연계에서 에너지는 ‘의하여’ 움직이지 결코 ‘위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의하여’는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지만, ‘위하여’는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결성이 약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관념에 기초한 삶은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 의지나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의 문제다. 차렷 자세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 없이 관념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은 관념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순간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은 관념이 아닌 다른 에너지원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의하여 산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삶은 아니다. 욕망의 에너지로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랑의 에너지로 사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들의 공통점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하여 사는 사람은 위하여 사는 사람이 갖지 못한 내부 발전소를 갖고 있는 셈이다. 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까닭은 목적을 ‘위한’ 행동에는 에너지가 자체 조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설령 동기부여가 되었다 해도 그것이 변화를 낳기는 어렵다. 동기부여가 목적의식을 갖게 하는 거라면 그것은 ‘위하여’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변화는 ‘의하여’ 일어나지 ‘위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위하여’ 교육의 한계


아이를 바꾸고 싶어 하는 부모나 교사는 아이의 바람직한 상을 나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되었으면 하는 모습과 지금 모습 사이에 괴리가 있고, 그 거리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 미래 모습은 이루어야 할 목표 같은 것이다. ‘위하여’의 세계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아이는 과거와 현재의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존재로, ‘의하여’의 세계에 살고 있다.

강은 바다에 이르기 위하여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중력과 주변의 지형에 의해 물길이 만들어진다. 강이 어떤 동기를 품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듯, 우리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에너지다. 그것은 생존의 에너지일 수도 있고 탐욕의 에너지 또는 사랑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계기, 진정한 동기(動機)는 언제나 에너지다. 전태일을 움직인 것은 생존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였지 ‘노동자를 위하고’ ‘민중을 위한다’는 관념이 아니었다.

물이 위치에너지에 ‘의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우리 몸 역시 중력과 위치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 걸을 때 어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다리 힘을 써서 걷는다고 생각하면 걷는 일이 힘든 노동이 된다. 중력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다리힘을 더 많이 쓰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지치게 되고 그래서 걷기를 더 싫어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걷기의 원리를 알면, 다시 말해 ‘의하여’ 걸으면 걷는 일은 힘든 일이 아니다. 중력에 순응하면 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저절로 걷게 된다. 걸음을 옮기는 일은 짝다리 짚기의 연속 동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하여 걸음’과 ‘의하여 걸음’의 차이는 교육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입시교육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게 하는 것인 반면, 진짜 공부는 배우는 것이 좋아서 배우기를 즐기는 것이다. 공자의 호학(好學)이다. 어미가 자식을 안고 기뻐하듯이(好)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다. ‘위하여 공부’는 위함의 대상이 무엇이든 공부 그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반면 ‘의하여 공부’는 자체 에너지로 앞으로 나아간다. ‘위하여’가 심리학의 세계라면 ‘의하여’는 물리학의 세계다. 심리는 물리를 넘어설 수 없다. 내일을 위해 사는 사람의 오늘은 결코 빛날 수 없다.

흔히 국가수준의 교육은 어떤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교육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7차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에 따르면 공교육의 목표는 ‘창의적이고 개성적이며 진취적인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학교의 교훈도 ‘위하여 교육’의 산물이다. 어떤 면에서 교육은 의도하는 목적을 ‘위하여’ 행하는 활동이다. 반면 배움과 성장은 ‘의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육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주체의 관점에서는 ‘위하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진정한 배움은 ‘의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주도 교육이 실패하기 쉬운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교사 또한 ‘위하여’의 함정에 갇히면 아이들과 분리된다. 아이들을 ‘위하는’ 교사는 아이들 편에 서 있지 않다. 부모나 교사가 어떤 목적이나 가치에 사로잡히면 아이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 민족중흥의 가치를 위해 국민 개개인이 수단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설령 진심으로 아이를 위하는 교사라 할지라도 그 ‘위함’은 일방적인 위함이기 십상이고, 근원적으로 폭력성을 띤다. 아이는 숨이 막히기 마련이고,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아이를 성장시키는 에너지가 아이 속에서 나오게 돕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역할이다. 나무는 하늘과 땅의 에너지에 ‘의하여’ 성장하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는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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