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단상

코로나 시대, 서로를 연결하는 교육

민들레
2020-09-23
조회수 198

지금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을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학교 문을 닫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몸을 잘 움직이지 않는 아이들이 등하교도 안 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더 움직이지 않게 되면서 여러 가지 이상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두 시간만 외출해도 쉽게 지친다거나 어딘가에 부딪혀 사소한 상처를 잘 입는다고 한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서 관절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기도 한다. 우리 몸은 습관에 매우 민감하다. 두어 달만 몸을 쓰지 않으면 근육도 몸의 유연성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직장인들은 재택근무가 이어지면서 출퇴근이 사라진 일상에 적응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나 작가들의 경우 아침마다 출근하는 ‘의식’을 일부러 치르는 이들이 있다. 옷을 갈아입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는 집으로 돌아와 옆방 작업실에 들어감으로써 몸과 마음이 일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학생들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등하교’라는 일상의 의식은 아이들로 하여금 몸과 마음이 적절한 긴장과 이완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학교를 ‘다니는’ 일은 알게 모르게 몸을 쓰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학교를 오가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걷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동물의 새끼들은 함께 뒹굴면서 민첩성과 근육을 기른다. 몸을 움직여 노는 일은 몸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연습이기도 하다. 학교 체육 시간이 흔히 공 하나 던져주고 마는 ‘아나공’ 시간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공을 주고받으며 노는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몸으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배움 중 하나다. 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협업 능력이 자라고, 공을 매개로 맥락을 읽는 훈련도 하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이런 모든 활동이 금지되고 있다. 전염의 위험을 막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지 ‘사회적’ 거리를 만드는 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친교활동과 경제활동이 모두 멈추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사회가 멈춤으로써 건강과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사노동 부담이 커지고 실업과 휴업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여성들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방역당국이 거리두기 2단계와 3단계 사이에서 고민하다 2.5단계를 시행하게 된 까닭도 거기 있을 것이다.

인류의 상호작용 총량이 일시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나 큰 방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은 생산량을 급격히 늘린 반면 노동의 질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표준화에 기반한 산업화가 유동성을 높여 세계화를 낳고, 마침내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을 불러왔지만, 이렇게 제 발등을 찍고서 시행착오를 시정해온 과정이 인류의 역사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시행착오를 바로잡는 일을 끊임없이 하는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인류는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전 지구적 규모로 기후위기 대응 행동이 일어나고, 잘 사는 나라들이 기금을 모아 백신을 개발해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도 공급하는 코백스(COVAX) 프로젝트 같은 것이 추진되는 것도 지구촌의 새로운 모습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들까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본래 모습임을 이제라도 다들 깨닫게 된다면 이 위기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코로나 시대에 신체성과 관계성 회복하기


사회적 동물인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친구를 찾는다.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에너지가 충전되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의 생장점이 외부 환경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꼭짓점에 있듯이, 긴밀한 상호작용 없이는 성장을 도모하기 힘들다. 아이들의 성장을 도우려면 서로 패스를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굼뜬 아이도 자기 앞으로 공이 오면 저절로 움직이게 된다.

모든 에너지가 그렇듯이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에너지 또한 방향성이 있다. 세상과 더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쪽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아빠보다 친구들을 더 찾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호작용의 총량이 늘어나는 방향이다.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친구 앞에서 살짝 긴장한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자신을 긴장시키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한다. 생명력이 더 고양되기 때문이다. 학교가 그나마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그런 친구를 만날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상호작용이 활발하려면 몸과 마음이 경직되지 않아야 한다. 바꿔 말하면 생명력으로 충만할 때 상호작용이 가장 활발할 수 있다. 신체성과 관계성은 사실 다른 말이 아니다. 식물은 흙과 햇볕, 비바람과의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서 성장하고 꽃을 피운다.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도 경직되지 않고 생기 넘치는 긴장감이 필요하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주변과 단절된 상태의 몸과 정신은 건강할 수 없다.

수업 시간에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은 이완된 게 아니라 맥(락)이 빠진 것이다. 연결이 느슨해지거나 끊어진 상태다. 입시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도 쉬는 시간이 되면 생생하게 살아나서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입시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에서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도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학교에서는 제 자리를 찾는다.

아이들이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다. 공동체의 주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깨어 있는 시민이 널브러져 있지 않듯이, 공동체의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은 널브러져 있을 수 없다. 가족이든 학교든 국가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건 속에 올라타 있을 때 우리는 주체성을 갖고 행동할 수 있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공동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제 역할을 하게 되면 그 속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물리적 거리두기를 넘어 친교 커뮤니티 자체를 마비시키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까운 이들끼리 좀 더 깊은 만남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작은 놀이 모둠, 학습 모둠이 곳곳에 생겨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활동까지 막는 것은 지나친 안전제일주의다. 작은 규모의 모둠활동은 밀집과 밀접, 밀폐, 3밀을 피하면서도 할 수 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까지 염려하다 보면 삶이 가능하지 않다.

학교 밖에서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연결망을 만들어보자. 예전에 친구네 집에서 모여 놀면서 같이 숙제도 하고 그랬던 것처럼. 아파트의 경우 친구네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정해 모일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을 좀더 개방하고 아이들을 매개로 부모들끼리도 가까워지면 육아공동체에 가까운 이웃사촌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 위기를 건강하게 넘어서기 위해서도 소규모 친교의 장을 더 적극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홈스쿨링이나 농촌유학을 선택하는 가정들이 늘고 있다.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집에 있게 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홈스쿨링을 시도하거나 아예 아이의 거주지를 시골로 옮겨 마을의 작은 학교를 다니게 하기도 한다. 현실적인 차선책이다. 가정과 학교, 사회가 협력하여 다양한 교육모델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마을배움터 같은 공유지가 늘어나서 학교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어도 좋을 것이다.

산업사회의 대량생산 방식에 최적화된 대규모 학교의 유효기간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더 앞당겨지고 있다. 당장 큰 학교를 쪼갤 수는 없지만, 운영 방식을 다르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학교 안의 학교’ 방식으로 의사결정 단위를 작게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학년별, 학급별로 자율적으로 움직이려면 먼저 교사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학교 민주화와도 직결된다. 코로나 위기를 학교문화를 바꾸는 기회로 만들어보자.


새삼, 학교란 무엇인가


디지털 원주민을 위한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존 카우치(John D. Couch)는 근대 학교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학교교육은 대본이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학생은 배우 역할을 한다(그리고 실제 배우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애쓰다가 소진된다). 교사는 작가(교육정책 입안자)가 만들고 프로듀서(정치가와 행정가)가 승인한 아주 엄격히 정해진 대본(교과서)대로 배우들을 이끄는 책임을 맡은 감독이다.”

애플의 교육 담당 부사장이기도 한 저자는 온라인을 통한 상호작용을 높게 평가하지만, 넷플릭스가 아무리 많은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해도 무대가 있는 극장의 기능까지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실은 연극 무대 같은 곳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배우들이 관객 역할까지 겸한다는 점이다. 교과서라는 대본이 있지만 실제로 대본대로 연기하지는 않는다.

교사도 아이들도 꼭두각시는 아니다. 교사의 이야기는 틈틈이 옆길로 새고, 아이들은 딴청도 피우면서 돌발 상황에 애드립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며 극을 끌어간다. 그리고 막이 내리면 막간에 관객들끼리 펼치는 막간극이 펼쳐진다. 아무런 대본도 없이 펼쳐내는 이 즉흥극이야말로 관객들이 극장에 오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막간의 시간이 짧은 것이 흠이지만, 그만큼 압축적으로 극이 펼쳐지기도 한다.

사실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함께 즉흥극을 펼칠 동료 배우들과 그것을 봐줄 관객들, 다시 말해 친구들이다. 어찌 보면 극장과 무대는 그들을 모으는 장치다. 하지만 극장만 무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외무대도 가능하고, 도심에서 플래시몹 같은 즉흥극을 펼칠 수도 있다. 무대는 어디나 될 수 있다. 정해진 대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배우와 관객이 있으면 된다. 거기에 훌륭한 연출가가 있으면 배우들은 더 빨리 성장하고 극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디지털 시대, 코로나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본을 고민하기에 앞서 아이들의 성장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디지털 시대, 비대면의 시대에 학교의 역할,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근대교육을 넘어서는 미래학교의 모델을 만들고자 야심차게 문을 연 알트스쿨의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2013년에 구글 수석 엔지니어가 설립하고 페이스북 창업자 저크버그 등이 거액을 투자하여 IT 기술을 기반으로 한 첨단 학교를 만들었지만, 어떤 아이는 몇 년이 지나도록 편지조차 쓰지 못하는 학습부진아가 되었다. 아이들이 노트북으로 개인맞춤형 교육 콘덴츠에 접속해 스스로 학습하고 교사는 코디네이터 역할에 충실하면 이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알트스쿨에서 3년간 교사로 일했던 폴 프랭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이 영상을 보며 무언가를 배우긴 하겠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교실의 문화와 학습 환경, 사람으로서의 선생님이 교실에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교사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교육 기능을 하는지 컴퓨터 알고리즘은 모른다. 흉내를 낼 수도 없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기술이 교육을 대체할 수는 없다. 교육은 교사의 등 뒤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도 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뒷모습이 없다. 메이커 로고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지금의 온라인 수업은 사실상 근대학교 모델을 온라인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교사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창의성을 발휘하여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습 진도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도는 EBS 강사 같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교사는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일에 집중하면 안 될까? 어차피 표준화된 교육과정인데 모든 교사들이 온라인 강의에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다.

표준화 교육의 효율성을 살리면서 교사의 역량은 그 부작용을 줄이는 데 집중해보자.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지원하고, 부모나 친구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돕는 데 더 힘을 쏟자. 학교 밖에서도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게 지원하고, 학교에 나오는 소수의 아이들과 더 깊이 만날 수도 있다. 코로나 시대는 교육이 본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게 학교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연극에서 연출가가 하는 역할은 극에 영혼을 불어넣는 일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비슷한 역할이다. 지휘자에 따라 같은 곡을 연주해도 다른 음악이 탄생한다. 아이들 또한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교육의 생명력은 교사에게 달려 있다. 학교는 교육기술의 시연장이 아니라 교육예술의 장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패턴을 읽고,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고, 상호작용을 북돋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일은 어떤 일보다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이다. 학교는 교육예술이 펼쳐지는 배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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